인텔과 AMD는 데스크톱 CPU의 최고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수십 년간 경쟁해 왔습니다. 현재 인텔 12세대 CPU와 AMD 라이젠 CPU는 현재 서로 엎치락뒷치락하며 재미있는 싸움을 하고 있죠.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닙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만, 인텔과 AMD처럼 이런 말이 딱 들어맞는 사례는 찾기 어려울 겁니다. 양사의 창립부터 혼란의 시대를 거쳐 2022년 지금까지, 역사를 되짚어보며 과연 이전 역사가 되풀이될지, 아니면 계속 평행선을 이어 나갈지 짐작해 보는 일도 재미있을 겁니다. 하지만 양사의 역사를 따로 설명해놓은 자료는 많아도, 한 번에 볼 수 있는 글은 찾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여러 자료를 취합하여 인텔, AMD 양사의 역사를 동시에 볼 수 있는 글을 준비해 봤습니다. 어려운 기술적 설명은 최대한 제외해서 쉽고 재미있는 글을 쓰기 위해 노력했으니 편한 마음으로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왼쪽부터 고든 무어, 로버트 노이스, 앤디 그로브
고든 무어와 로버트 노이스가 1968년 인텔을 공동 설립, 출처: 인텔
리사 수 AMD CEO(왼쪽), 제리 샌더스 AMD 창립자(오른쪽)
출처: 리사 수 트위터
인텔은 1968년, AMD는 1969년 각각 창립되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양사 창립자 모두 페어차일드 반도체라는 회사에서 근무하다가 퇴사한 후 회사를 만들었습니다.
인텔 i4004, 출처: 인텔
시작이 비슷했던 두 회사는, 성장 단계부터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나아갑니다.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한 1969년, 인텔은 최초의 제품인 1101 SRAM을 출시하고, 1년 뒤에는 1103 DRAM 반도체로 명성을 쌓았습니다. 인텔은 바로 1년 뒤인 1971년, 최초의 CPU인 i4004를 출시합니다. AMD는 1969년 디지털 회로의 일종인 Am9300 시프트 레지스터를 출시했습니다. 이후 AMD는 다양한 논리 회로를 만들며 크기를 불려 나갔고, 인텔도 i4004를 다듬어서 i4040, i8008, i8080 등을 출시했습니다.
AMD Am9080, 출처: wikimedia
두 회사가 이어지는 건 이때부터입니다. 1975년, AMD는 인텔이 출시한 i8080을 역설계하여 최초의 CPU인 Am9080을 선보였으며, 1976년에는 인텔과 CPU 및 마이크로코드에 대한 저작권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합니다.
1978년, 인텔에서 CPU 역사에 기념비적인 제품이 출시됩니다. 최초의 x86 아키텍처 CPU, i8086의 등장입니다. x86 아키텍처는 지금까지 호환, 확장되며 다양한 명령어의 기반이 되고 있습니다. 다만, 당시 인텔은 지금과 달리 충분한 반도체 생산능력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다른 반도체 생산업체와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했고, 여기에는 AMD도 있었습니다.
Intel i8086, 출처: wikimedia
지금은 글로벌파운드리로 분리되어 완전한 팹리스(생산 시설 없이 설계만하는) 기업이 된 AMD지만, 창립자인 제리 샌더스는 반도체 회사라면 팹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 팹에서 인텔 호환 CPU를 생산했습니다. 1982년, AMD는 인텔이 개발한 CPU를 생산할 수 있는 권리를 얻는 대신, 로열티를 지급하는 10년 계약을 체결합니다. 이 계약에 따라 i8086을 Am8086으로, i8088을 Am8088로 출시합니다.
Am386에 대한 법정 소송 판결문중 일부, 출처: findlaw
이런 상황은 수년 동안 이어져서, 인텔 i80286이 AMD Am286(Am80286)으로 출시됩니다. 이들 CPU는 제조사는 다르지만, 설계와 내부 코드가 같으므로 사실상 같은 제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AMD를 비롯하여 인텔과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한 회사는 인텔이 출시한 제품보다 더 고 클록으로 작동하는 제품을 출시해서 성능을 높였고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인텔이 아무리 로열티를 받는다고 해도 전체적인 제품 판매량이 떨어져서 결국 회사 수익이 악화하는 결과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는 1985년 출시한 인텔 i80386으로 절정에 달합니다. 인텔은 i80386 소스 제공을 거부했고, 인텔과 AMD는 라이센스 및 x86 아키텍처 독점에 관련한 치열한 법정 공방을 벌입니다. 무려 10년 넘게 이어진 싸움은 인텔과 AMD가 승소와 패소를 반복하며 지루하게 이어집니다. AMD는 소스를 받지 못했으므로 인텔 호환 CPU를 생산하지 못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여기서 AMD는 대담한 결정을 내리는데, i80386 소스 없이 자체적으로 설계한 80386 CPU를 만들어내는 일이었습니다.
AMD Am386, 출처: wikimedia
2년간의 설계 끝에 1991년, AMD는 Am386(Am80386)을 출시합니다. i80386보다 나중에 나온 만큼 더 높은 클록으로 작동하는 파생 제품을 출시하면서 성능을 높였죠. 하지만 인텔은 그보다 2년 이른 1989년 i486(i80486)을 출시한 뒤였습니다. 더 뒤처질 수 없던 AMD는 1993년, Am486을 출시합니다. 출시 당시부터 고 클록 제품을 내세워서 격차를 상당히 줄이는 데 성공합니다. 여담으로 과거 CPU 이름을 칭하는 286, 386, 486은 이 시기입니다. 286과 386이란 명칭이 익숙하다면, 정밀 건강검진을 받아 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286, 386, 486에 이어 586이 등장해야 했으나, 이런 숫자 네이밍은 널리 퍼져 있어 누구나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인텔은 386이라는 명칭을 상표권으로 보호하고 싶었으나, 이미 널리 사용되고 있어 고유 상표로 인정할 수 없다는 법원 결정이 내려지면서 새로운 이름이 필요해졌죠. 심지어 586이라는 이름을 호환 CPU 제조사가 미리 사용하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그에 따라 인텔은 586 대신 새로운 CPU 이름을 사용하기로 합니다.
P5 펜티엄, 출처: wikimedia
1993년, 이렇게 등장한 게 지금도 엔트리 등급 브랜드로 사용되는 이름, 펜티엄입니다. 다만, 처음 공개된 P5 펜티엄은 전 세대인 i486 후기 제품과 비교하면 성능적으로 떨어지는 부분도 있었고, 가격적으로도 경쟁하기 어려운 제품이었습니다. 1994년, P54C 펜티엄으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 1997년 출시한 P55C MMX 펜티엄은 성능을 크게 높여서 드디어 주력 제품이 펜티엄으로 대체됩니다.
출처: grantherbert
AMD는 x86 아키텍처 CPU인 486 외에 RISC 아키텍처 CPU를 독자 개발하여 1988년, Am29000으로 출시하고 있었습니다. RISC 아키텍처는 데스크톱 CPU에서는 널리 사용되지 못했지만, ARM 계열 CPU에 사용되어 x86 못지않게 폭넓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Am29000은 임베디드 시장에서 점유율을 올리고 있었는데, 1995년에 개발팀을 x86으로 배치하고 Am29050을 AMD K5로 출시합니다. 알파벳 K는 인텔을 슈퍼맨으로 상정하고 슈퍼맨의 약점인 크립토나이트(Kryptonite)의 앞글자를 따서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AMD K5는 인텔의 영향을 받지 않은 완전한 독자적인 첫 번째 x86 CPU로써 의의가 있지만, 동시기 펜티엄보다는 성능이 낮았습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K6를 개발하던 AMD지만, 여기서도 난항을 겪습니다. AMD는 결국 CPU 설계 회사인 미국 NexGen을 인수하고, NexGen이 개발하던 Nx686을 K6로 출시하기로 합니다. 결과적으로 AMD에서 자체 개발한 CPU는 K5에서 끊깁니다. 1997년, AMD-K6가 출시됩니다. 지금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지만, AMD-K6는 소켓 7을 사용했는데, 인텔 P5 펜티엄 시리즈 메인보드와 호환됩니다.
펜티엄 프로, 출처: wikimedia
1995년 출시된 펜티엄 프로는 최초로 P6 아키텍처를 사용하여 32비트 연산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아직 32비트 OS인 윈도우 95나 98로의 이행이 완벽하지 않았고, 심지어 이들 OS 내부에도 16비트 코드가 많이 남아있었습니다. 따라서 원래 목표로 하던 성능보다 낮아졌고, 고용량 L2 캐시를 CPU와 같은 패키지에 올리는 MCM 방식으로 탑재하여 가격도 굉장했습니다. 결국 일반 소비자용으로는 외면받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단점들은 서버나 워크스테이션 시장에서는 없는 일이나 마찬가지였고, 펜티엄 프로는 서버/워크스테이션 시장에서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둡니다.
펜티엄 프로가 중요한 이유는 이후 10년 넘게 출시된 모든 인텔 CPU의 기본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펜티엄 프로의 P6 아키텍처 자체가 1995년부터 2006년 출시한 코어 시리즈까지 유지되고, 코어 2를 비롯한 코어 i시리즈 모두 P6 아키텍처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만큼 잘 만들어진 아키텍처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오래된 아키텍처를 사용하던 인텔은 결국 2018년, 보안 이슈를 맞이하며 위기가 찾아옵니다.
펜티엄 II, 출처: wikimedia
인텔 CPU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펜티엄 프로지만, 데스크톱 시장에는 안착하지 못했고, 인텔은 1997년에 역시 P6 아키텍처를 사용하는 펜티엄 II를 출시합니다. 펜티엄 II는 16비트 성능을 개선하고, L2 캐시를 MCM 대신 기판에 따로 올리는 방식으로 가격을 낮춰서 성공합니다. 지금은 작고 네모난 형태의 CPU뿐이지만, 당시 CPU는 그래픽카드처럼 슬롯 형태에 쿨러가 기본으로 붙어있었습니다.
1998년에는 펜티엄 못지않게 지금까지 오랜 기간 사용되는 브랜드, 셀러론이 등장합니다. L2 캐시가 빠진 만큼, 성능은 낮았지만, 저렴한 가격으로 엔트리 등급에 투입함으로써 점유율을 높입니다. 추가로 서버/워크스테이션 시장 용으로 펜티엄 II 제온을 출시하여 제온이라는 이름의 시작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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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D-K6는 펜티엄 프로와 비교하여 전체적으로 성능이 떨어졌기 때문에, 명령어를 추가한 K6-2를 1998년 출시하여 대항하고자 합니다. 지루한 대결 구도가 지속되자, AMD는 이 시점에서 판도를 바꾸기 위해 새로운 K7 아키텍처로 바꾸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좀 더 시간이 필요했고, K6-2에 L2 캐시를 탑재한 K6-III를 1999년 출시합니다. 하지만 L2 캐시를 탑재하면서 단가가 상승하고 캐시 메모리와 병목 현상 및, 클록이 500 MHz 근처에서 정체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 시절 AMD는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지만, 다음 세대에서 큰 빛을 보게 됩니다.
AMD-K6-2, 출처: wikimedia
슬롯형 펜티엄 III, 출처: wikimedia
1999년 인텔은 펜티엄 III를 출시합니다. 클록이 450 MHz에 머물러 있던 펜티엄 II에 비해 600 MHz까지 끌어올리는 데 성공합니다. 처음에는 펜티엄 II처럼 슬롯 형태로 출시되었으나, 얼마 후에 L2 캐시를 원칩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여, CPU 모양이 슬롯에서 다시 우리가 알고 있는 작고 네모난 소켓 형태로 돌아옵니다. 다만, 바로 바뀌면 기존 메인보드 사용자는 반발이 생길 게 분명했으므로 슬롯 형태와 병행하여 출시합니다.
소켓형 펜티엄 III, 출처: wikimedia
AMD 애슬론 CPU, 출처: wikimedia
AMD-K6 아키텍처에 이어 1999년 등장한 게 K7입니다. AMD는 이 시기 CPU 브랜드로 지금까지 회자되는 이름, 애슬론을 처음으로 사용합니다. 당시 멀티코어 CPU는 서버/워크스테이션 시장의 전유물로 여겨졌고, 대신 인텔과 AMD는 CPU 클록으로 성능을 높이는 클록 경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회사가 먼저 마의 1 GHz에 달성하는지 흥미진진하게 이어지는 대결은 이 시기에 결판이 납니다. 2000년 3월, AMD는 세계 최초로 1 GHz의 벽을 돌파한 K75 애슬론 CPU를 출시해서 인텔에 우위를 점하는 데 성공합니다.
AMD 애슬론 1 GHz, 출처: akiba-pc.watch
후속으로 등장한 썬더버드에서는 비로소 L2 캐시를 원칩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여 펜티엄 III처럼 CPU가 슬롯에서 소켓 형태로 바뀝니다. 계속 클록을 끌어올린 K7 아키텍처는 2003년, 2 GHz에 도달합니다.
인텔 펜티엄 4 1.5 GHz, 출처: wikimedia
AMD에게 최초의 1 GHz CPU 자리를 넘겨준 인텔이지만,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인텔 역시 클록을 끌어올리며 성능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펜티엄 III는 클록이 1.5 GHz에서 정체되었고, AMD K7에 성능적으로도 뒤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인텔은 대담하면서 해서는 안 될 결정을 내립니다. 클록을 엄청나게 올릴 수 있는 CPU의 개발입니다.
그렇게 넷버스트 아키텍처가 탄생합니다. 넷버스트 아키텍처는 클록 경쟁에서 승리하고자 클록을 높이기 쉬운 설계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같은 클록에서는 이전 세대인 펜티엄 III보다 성능이 낮은 경우가 발생했습니다. 인텔은 클록을 높임으로써 성능 하락을 무마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최악의 선택이 되고 맙니다. 펜티엄 4는 처음 등장한 제품부터 1.5 GHz였고, 2001년에는 2 GHz를 달성합니다.
대한민국이 붉은 물결로 넘실거리던 2002년, 인텔은 공정을 미세화하고 캐시 메모리를 늘리면서 소비전력까지 낮춘 노스우드를 통해 어느 정도 만회하는데 성공합니다. 이 시기 서버/워크스테이션용 제온에 최초로 하이퍼스레딩 기술을 도입하여 해당 시장에서도 탄탄한 입지를 다집니다. 이때까지 펜티엄 4는 무난하게 신제품을 출시하며 AMD와 비등한 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 시기에 발생합니다. AMD가 2002년 K8 아키텍처의 애슬론 64 성능을 공개했기 때문인데, 이 제품이 출시되면 어려운 싸움이 될 게 분명했습니다. 밖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AMD는 K8에 사용할 130nm 공정 개발에 난항을 겪고 있었고, K8 아키텍처 초반에는 공정 때문에 제대로 제품을 출시하지 못하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합니다. 하지만 이를 몰랐던 인텔은 서둘러 펜티엄 4의 성능을 끌어올리기로 합니다.
인텔 펜티엄 4 프레스캇 2.4 GHz, 출처: wikimedia
2004년, 프레스캇이 불타오르며 등장합니다. 클록을 더 올리기 쉽게 개선했으나, 오직 성능에만 신경 써서 소비전력과 발열이 무지막지하게 올라버립니다. 130nm 공정 문제를 힘겹게 해결한 AMD가 K8 아키텍처의 애슬론 64를 출시하자 불안하게 평행선을 달리던 CPU 시장에서 승자가 결정됩니다. 혼자서 자멸해버린 인텔과 높은 산을 넘어온 AMD의 싸움은 AMD의 승리로 마무리됩니다.
출처: 오분순삭 유튜브
2005년, 인텔은 프레스캇의 L2 캐시 용량을 늘리거나 프레스캇 2개를 MCM으로 2개 탑재하는 듀얼코어 제품을 출시하며 어떻게든 싸움을 이어 나가고자 합니다. 하지만 AMD는 이런 인텔의 노력을 비웃듯, 원칩 듀얼코어 CPU인 애슬론 64 X2를 출시하며 격차를 더 벌립니다. 인텔은 공정을 65nm로 미세화하고 MCM 듀얼코어에 하이퍼스레딩을 도입하여 무려 4스레드 CPU를 출시하는 등, 발버둥 치지만 AMD 역시 꾸준히 성능을 높이며 추격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AMD는 거대한 벽처럼 인텔을 가로막고 서 있게 됩니다.
AMD 애슬론 64 X2 5200, 출처: wikimedia